링거액
이 은 영
추위가 막바지에 시샘을 하는가 보다. 한 겨울 잘 보내나 했더니 갑자기 감기가 찾아와선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최근 일 문제로 신경 쓴 것이 병이 되고 말았다. 내 뜻과는 달리 상대가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이 마음에 상처로 남아 밤잠을 설쳤다. 조금은 무던해지고 편하게 생각하면 좋을 텐데 쉽게 안 된다. 남에게 위로나 충고는 하기 쉬워도 막상 내 일로 다가오면 힘들어지는 게 세상일인가 보다. 아직 내게는 연륜이 많이 부족한 모양이다.
병원을 찾았다. 조금 낫는 듯하여 약을 끊었더니 또 재발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생활도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집안은 집안대로 엉망이고 애들도 뒷전이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앓는 소리만 내고 있다. 감기 하나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지기까지 한다. 만사가 귀찮다. 살아 있다는 것이 고통스럽다.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 벗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만이 든다.
내가 아프든지 말든지 변함없이 술 마시고 늦게 귀가하는 남편도 밉다. 곧 죽을 것 같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시오라는 소리를 들으면 한번 쳐다봐 줄라나. 워낙에 무뚝뚝한 사람이니 일찍이 어떠한 기대도 안 했지만 몸이 아프니 더욱 남편이 싫어진다. 들어오면 엉덩이를 냅다 차리라.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으면 눈도 마주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렇게 한다고 시원찮은 내 몸이 완쾌되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결국은 몸 관리 못한 나의 잘못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겨내는 것도 내 몫이다.
십 일째 계속되는 감기에 지쳐간다. 코는 맹맹하고 머리는 지끈거린다. 이제 약발도 듣지 않는다. 친구의 권유로 영양제 주사를 맞으러 갔다. 의사한테 약은 그만 먹고 싶으니 영양제 주사만 달라고 했다. 뜨끈뜨끈한 침대에 눕는다. 간호사가 내 손에 주사를 놓으니 노란 병에 들어 있는 영양제가 호스를 타고 몸으로 들어간다. 노란약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다. 저 약이 곧 나를 살려낼 것만 같다. 지금으로선 남편보다도 더 고마운 존재가 아닌가. 옆자리에 할머니 한 분이 누워 있다. 누운 채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하고 있다. 나와 똑같은 영양제를 맞고 있다.
할머니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간호사에게 사는 게 재미가 없다고 했다. 오늘 아침 밥을 먹으려는 데 눈물이 흘렀다고 하면서. 나는 고개를 돌려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울고 있다. 울음이 그칠 줄 모른다. 서러움이 묻어난다. 간호사는 할아버지가 잘해 주시는 것 같던데 왜 그러시냐면서 나이가 들면 눈물이 많아지는가 보다고 했다. 주머니에 있던 사탕 하나를 꺼내서 기운 내라며 할머니 입에 넣어드린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도 소용없다고 했다. 나처럼 남편한테 관심을 받지 못한 걸까. 몸이 허약해지니 마음이 약해져 있는 듯하다. 동병상련을 느낀다. 할머니한테 힘내라고 말해드리고 싶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할머니는 링거액을 몸에 넣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역사책을 뒤적이다가 문득 인도의 타지마할을 보았다. 무굴제국의 샤 자한 황제가 아내 뭄타즈 마할을 위해 지은 궁전 형식의 묘라는 설명이 있다. 우윳빛 대리석으로 지었는데 완벽한 대칭이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건물의 아름다음이 아니라 황제가 아내를 위해 이런 묘를 만들었다는 데 마음이 머문다. 아내는 죽었어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어 그 마음을 무덤으로 남기고자 했을 것이다. 내 남편이 황제라면…….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등 맞대고 같이 사는 사람이 있어도 허전함에 눈물 흘리는 사람이 많다. 몸은 같이 있으나 마음이 멀리 있으면 허전함이 배가될지도 모른다. 가장 가까이에서 위로하며 아픔을 함께 해야 할 사람에게 외면당하는 것은 서러움이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링거액을 보면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영양제가 되는 그런 존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누군가에게 링거액보다 못한 의미가 된다면 삶이 삭막해질 것 같다. 할머니는 링거액이 다 들어가자 집에 갈 채비를 한다. 흐느끼며 울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무덤덤해 보인다.
나 역시 마지막 남은 노란 수액이 혈관으로 들어가고 있다. 주사바늘을 빼니 손등에 작은 멍이 남는다. 할머니의 손등에도 멍이 들었겠지. 허나 눈에 보이는 이 멍은 며칠이 지나면 없어질 것이다. 할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뒷모습을 보인다. 할머니가 떠난 병실은 고요하기만 하다.
• 약력
*수필가
*거제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수료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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