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대 다닐 폭만큼 포장된 산길이다. 양 옆은 잡목이 우거져 있다. 일 년 가까이 이 길로 산책을 다녔어도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 지난겨울 숲이 앙상해지자 잡목들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바윗돌 두 개가 비스듬히 기운 채로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저게 뭐지?’
뒤엉겨 가시를 세운 청미래 덩굴을 걷어가며 가까이 가 보았다. 인적 없는 외진 곳도 아니건만 사람이 가까이 다가간 흔적이 없다. 잡목과 가시 덩굴 속 바윗돌은 다름 아닌 돌비석이었다. 밋밋한 면에 '佐藤先生之墓(사토선생지묘)’ 라고 새겨져 있다.
“해방 전부터 있던 것이겠지?“
“모르긴 해도 그렇겠지.”
곱게 다듬지도 못한 납작한 바윗돌에 이름만 새겨져 있을 뿐 생년(生年)도 졸일(卒日)도 없다. 돌보지 않은 비석엔 해묵은 돌이끼가 더께처럼 덮여 있고, 기운 비석 앞에는 상수리나무가 자라고 있다. 어쩌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역의 산자락 끝에 자취를 남겨두게 되었을까? 돌비석 세워 주던 이승의 인연은 어디 갔을까? 이토록 무심히 내버려 둘 거라면 진즉에 고국으로 보내는 편이 나았을 텐데……이곳을 지날 때마다 이런 저런 추측을 하며 발길을 주춤거렸다.
조선반도의 남단. 작은 포구 마을에 흘러들게 된 사토선생을 내 나름대로 상상하여 그려 봤다. 그는 일본이 전쟁의 광기(狂氣)로 인간이 피폐해 가는데 염증을 느끼고 자원하여 온 심상소학교 선생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식민통치라는 명목으로 징발, 말살, 유린, 수탈하는 일본의 행태에 혐오를 느꼈다. 잘못되어 간다는 것도 알고는 있지만 대의에 따라야 하는 자신의 입장이 늘 괴로웠다. 이 나라에 정이 가고 동화되어 가면서도 겉으로 드러내놓고 좋아하지 못하여 외로웠다.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마음을 쏟으며 어지러운 세상을 잊을 뿐이었다. 낯모르는 이방인 사토선생은 내 마음 속 그렇게 정해졌다. 남 다른 연민이 느껴져 이 돌비석의 연고자가 된 착각마저 들었다.
일본에서 십여 년을 살다가 돌아오며 아이를 그 곳에 남겨두고 왔다. 두고 왔다고 하는 것은 부모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아이는 그 곳에서 제가 선택한 길을 가고 있다. 어릴 적부터 그 나라 교육과 그 문화를 익히며 자란 아이다. 한국인의 핏줄을 타고 났고, 부모의 슬하에 있던 성장 배경이 한국적일 뿐 그 아이를 움직이는 소프트웨어는 우리네 정서만은 아니다. 우린 그런 아이를 두고 ‘심장은 한국산 머리는 일본제’ 라고 말한다.
아들의 연인은 일본인이다. 지극히 전형적인 일본 아가씨다. 그대로 간다면 우리는 일본 여자를 며느리로 보게 될 것이다. 선대에 독립 운동을 했고, 민족주의가 강한 집안에서 일녀(日女)와 결혼은 고려해 봐야 하지 않겠냐고, 친정 오라비가 이야기 끝에 슬쩍 제동을 걸었다. 교제를 한다는 것이지 당장 결혼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더 이상 할 말을 막았다. 저변 문화가 다른 사람이 가족이 되어서 부딪혀야 하는 어려움도 많이 있을 것이다. 과거의 뼈아픈 역사나 국가간의 첨예한 문제를 두고 정치가나 일부 인사의 이권 발언이 가족간 골을 파이게 하지는 않을까, 지레 걱정스럽기도 하다. 우리 민족은 당했던 과거가 있어서 일본이 좋다, 일본인이 좋다고 말하길 주저한다. 그러나 그런 우려의 걱정이 가로 놓여 있어도 둘의 사랑을 뜯어 말릴 의사는 없다.
일본에 살며 영주권을 신청했다. 세밀히 기재해야 하는 신청서 끝부분에는 자신의 의지를 간단히 적는 항목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사회적으로는 자국과 일본의 교류와 소통에 일조할 수 있는 가교(架橋)가 되는데 힘을 보태겠다고 적었다. 그것은 서류상의 요식적인 말이 아닌 진정한 본마음이었다. 영주권을 내주는데 까다로운 일본이 영주권을 내주었다.
그 후 부모는 돌아오고 아이는 홀로 남았다. 젊은 아이이니 제 갈 길을 꿋꿋하게 간다고는 하지만 어느 사회나 다수 속에서 소수로 살기는 외롭고 힘이 드는 것이다. 그것이 교제든 결혼이든 말릴 수 없는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객지에 있는 장성한 자식을 위해 부모의 잔손이 갈 일은 없다. 다만 어미가 객을 위해 베푸는 마음이 있으면 객지에 있는 내 자식도 은인을 만나겠거니 하는 믿음을 늘 마음에 두고 산다. 그 바람이 내 자식만을 위해서랴. 어미 곁을 떠나 있는 많은 젊은 자식들을 위하는 마음에서다.
산책길에 조그만 낫과 젖은 수건을 챙겨들고 나섰다. 돌비석을 닦아준다. 두 나라의 수심 가득한 얼룩을 지운다. 가시 덩굴을 걷어치우고, 해를 가리는 나뭇가지를 베어냈다. 햇살이 돌비석을 비춘다. 백골이 진토 된 사토선생의 외로움이 살짝 걷히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