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온다. 여름을 뜨겁게 살아내던 나무도 지친 몸을 쉬고 있다. 후두둑 빗방울 소리에도 낙엽은 떨어진다. 잎이 진 자리에 그리움이 남아 있다. 길가 가로수는 머지않아 빈 몸으로 겨울 삭풍을 견뎌낼 것이다. 찬란한 봄을 위해.
결혼식이 있어 고향에 갔다. 시간을 내서 시댁에 들렀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고향은 방문하기가 점점 낯설어진다. 우편함에 넣어둔 열쇠를 찾아 문을 열었다. 나무대문이 낡은 소리를 내며 열린다. 집짓기에 열중하던 거미는 낯선 방문객에 놀랐는지 하던 일을 멈췄다. 곤충들이 주인행세를 하며 빈 집을 지키고 있었다.
집을 비워둔 지 십 년, 사람의 손때가 타지 않은 집은 노쇠한 아버님의 모습을 닮았다. 사십여 년의 세월을 이고 살던 지붕도 힘에 겨웠는지 곳곳에 비가 새고 자꾸만 낡아간다. 집도 사람의 온기를 받아서 숨을 쉬고 살아가나 보다. 따스한 햇살이 노닐던 앞뜰, 집안을 쩌렁쩌렁 울리던 아버님의 목소리, 문간방에서 간간히 들리던 피아노 소리, 장독대를 오르내리던 시어머님의 발자국 소리······. 모든 것이 세월의 시간 속에 묻히고 정적만 남았다.
아버님은 큰 아들을 결혼시킬 요량으로 미리 이 집을 장만하셨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술을 배워야만 가난을 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일본행 밀항선을 탔다. 그곳에서 기술을 익혔고 대동아 전쟁을 겪으며 많은 고생을 하셨다. 그 후 고국에서 겪은 여순반란사건, 그리고 민족의 아픔 6·25, 시대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으면서 사셨다. 그에게는 근면과 성실함만이 유일한 자산이었다.
갓 시집온 며느리를 위해 낯선 환경과 문화에 잘 적응하도록 보이지 않은 배려와 사랑으로 감싸 주셨지만 나는 과묵한 아버님이 어려웠다. 첫 손자를 보았을 때는 아기침대와 장난감을 사 오고 손수 목욕을 시키며 흐뭇해 하셨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밤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응급실로 달려갔다. 그의 팔에는 링거 줄이 달려 있었고 몸은 여러 개의 줄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중풍으로 쓰러져 의식도 없이 누워 있었던 것이다. 가족들은 돌아가며 간병을 했다.
얼굴과 손발을 닦고 주무르며 욕창이라도 생길까 봐 체위를 바꿔드렸다. 그동안 감정 표현이 서툴렀던 나는 알아듣진 못해도 말을 건네고 안아 드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미처 마음을 열지 못했던 나 자신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린 더 끈끈한 가족이 되어갔다. 정성을 다했지만 끝내 판도라의 상자는 열리지 않았고 그는 세상과 영원히 이별했다.
집은 단순히 밥 먹고 잠자는 곳이 아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몸과 마음의 안식처이며 내일을 위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아버님이 계실 때는 그 곳이 온기이고 사랑의 자리인 줄을 몰랐다. 그는 이 집처럼 세상의 거센 비바람으로부터 우리를 묵묵히 지켰던 것이다. 그가 떠난 빈자리가 허전하다. 가구를 치울 때면 그 자리가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람이 떠난 자리는 다르다. 그때서야 소중함과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아버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 당신의 빈 집에 여전히 먼지와 함께 쌓여있었다.
오랜만에 남편은 허물어진 지붕을 손보고 묵은 먼지를 털어낸다. 집안에 활기가 돈다. 당신의 눈길이 머물던 앞뜰엔 햇살이 가득찰 것을 상상한다. 채송화와 봉숭아를 심어야겠다. 손자들의 손톱에 노을처럼 고운 물이 들 것이다. 당신이 앉았던 창가엔 솔바람이 머물다 가겠지. 비가 한 줄기 바람을 몰고 와 창문을 두드린다. 최남선님의 시가 생각난다.
가만히 오는 비가 낙수 져서 소리하니
오마지 않는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