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광 미

삶은 끊임없이 순환되는 것인가 보다. 매일 새롭게 음식을 준비하고 그것을 담는 식기들을 설거지한다. 싱크대 속은 회개의 장소다. 제 임무를 다한 그릇들은 자기 정화를 위해 감정의 찌꺼기를 물속에서 씻어내고, 설령 오래 묶어 말라붙은 감정이라 할지라도 조급하지 않게 스스로 떨어져 나가게 한다. 이처럼 사는 일도 감정의 찌꺼기를 흘려보내는 단순한 반복이 되풀이 되고 있을 것이다.

매일 사용하는 싱크대와 상판 사이 발라둔 실리콘 위에는 물때가 앉기 마련이다. 청소할 때 소독세제로 말끔히 닦아낸다. 이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싱크대와 밀착되어 있던 실리콘도 조금씩 들뜨기 마련이다. 끝부분이 손 가시처럼 일어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칼날로 깔끔히 떼어 내었다. 매사 반듯하게 정리된 게 좋았고 작은 흠집에도 무척 신경을 썼다. 여간해서 나의 속내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 내면에는 흐트러진 속내를 가리고 싶은 마음이 꽈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싱크대 속으로 연결된 호수에 감정의 찌꺼기가 흘러가는 것을 가리개로 가려 놓은 것처럼. 실리콘 아래 들떠 있던 홈 사이로 계속 스민 물기가 마룻바닥에 조금씩 고여 마침내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가리개 밖으로 나온 물처럼 내 마음도 새어 나오는 물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결국은 찾게 된 병원. 진료실 앞 복도에는 이미 접수를 마친 대기자들이 앉아 있다. 오래된 병원의 건물이다. 초겨울 바깥 기온과 차이를 좁히느라 나지에이트는 더운 숨을 내쉬고 있다. 바깥세상과는 달리 복도 안의 공기는 팽창되어 있다. 의자를 차지하고 앉은 대기자들도 복도의 공기를 닮은 듯하다.

그들은 긴장의 끈을 조이며 어색한 시선으로 서로를 곁눈질하며 궁금증을 누르고 있는 듯하다. 정해진 상담시간의 한계가 없기에 언제 자신의 차례가 돌아올지 가늠할 수 없다. 대기의자에 앉은 모녀의 낮은 음역대의 목소리만 간간이 느껴질 뿐. 건너편에 있던 육십 대쯤 보이는 남자가 참다못해 일어나 모녀에게 다가가더니 복도의 침묵을 깨뜨린다.

“나는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도대체 안 와서 왔는데, 어찌 왔능교?
“어리다고 마음 힘든 게 없겠능교···.”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딸의 손을 꼭 잡아준다. 그들의 대화로 긴장의 끈을 조금씩 푼다. 나와 비슷한 증상의 환자라는 것이 일종의 위안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즈음 나는 사랑하는 가족을 연이어 잃은 뒤였다. 묵묵히 버틴 가리개의 한계처럼 안으로 품었다. 잠재의식 속에 억제된 감정들을 주체하지 못하고 병원을 찾게 되었다. 오기까지는 쉽지 않은 걸음이었다. 외부로 드러나는 상처의 통증이라면 주저함이 없었을 것이다. 억압되어 쌓인 감정들이 다양하게 신호를 보내기도 하고, 해소해 달라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내 마음에 대류가 일어나지 못하여 바람은 불지 않았고 순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료실 안에서 늘 마주하고 매 순간 흘려보냈을 시간들을 돌아본다. 기억에 얽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나를 만난다. 감정은 배설되고 자기 정화를 거칠 때 건강한 자아를 가질 수 있다. 나의 내면과 때로는 논쟁하고 화해하는 과정이 진정한 소통이 일 것이다. 순간 초겨울 바람이 얼굴을 알싸하게 와 닿는다. 누군가 일어나 바깥으로 난 창문을 연 것이다. 갇혀있던 공기가 순환 되고 있다. 손에 쥐고 있던 대기표 번호가 병원 내 약국 전광판에 켜진다. 집으로 돌아가 다리가리개를 떼어내기로 생각하니 내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모처럼 현관문을 열어젖히고 베란다 문도 열었다. 바닥에 고여 있던 물을 닦아낸다. 한동안 다리가리개를 떼어둘 생각이다. 갇혀 있던 생각들도 바람 좋은 날 보송보송한 감촉이 생기도록 햇빛에 건조시켜 볼 참이다. 그간 보이는 것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했는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존재함, 그 자체로 순리에 따르는 법을 받아들인다.

 -약력-

* 부산 출생
*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
*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 한국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