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한 장의 두께
 
 
 
 
                                                                                                                                            이 혜 영
 

그래도 그때는 동물이라 큰 죄의식을 갖지는 않았다. 설마 사람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 예상도 빚나가고 말았다.

동남아는 교통체증이 극심하다. 서민층들은 교통수단으로 대부분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한 길이었다. 교통체증을 염려해서 일찍 서둘러 길을 나섰다. 출근하기 전, 이른 시간이라 거리는 다행히도 한산한 편이었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달리던 차가 터널로 막 들어섰을 때였다. 도로에 사람이 대자로 누운 모습이 보였다. 옆에는 달리다가 부서진 오토바이가 나뒹굴어져 있었다. 하마터면 그대로 넘어설 뻔했다. 이번에도 얼굴부터 가리고 비명 지르기에 바빴다. 내려서 수습하려는 기사를 오히려 저지했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불리한 입장으로 내몰릴 것이 두려웠다.

어떤 외국인이 당했던 이야기만 안 들었어도 이렇게까지 비겁하지는 않았을 터다. 한 외국인이 이곳에서 교통사고를 내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현지 사람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놀란 외국인이 차에서 내려 수습을 하고 돌아와 보니, 뒤에 타고 있던 자신의 아들이 죽어 있었다. 현지 사람들의 무서운 보복이었다. 평소에는 선량하지만 불의를 당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현지사람들이다. 또 중국에서도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을 구해 주다가 오히려 범인으로 몰려 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생명의 중함보다 신변의 위협 때문에 또 다시 비겁할 수밖에 없었다. 오토바이를 타고가다 멈춘 현지인이 우리와 눈이 마주쳤다. 서로 눈치를 보던 중, 우리 차가 먼저 그 자리를 피해 버리고 말았다. 그에게 미루고 만 것이다.

나는 절대 비도덕적이지 않은 줄 알았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오히려 비난을 했다. 길거리에 걸린, 도주 차량 목격자를 찾는다는 플래카드를 보면서도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곤 했었다. 그런 내가 그 못지않은 짓을 저질렀다. 스스로도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었다. 나도 별 수 없다는 걸 안 순간,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한동안 죄책감이 떠나질 않았다. 기력도 없고 입맛도 달아났다. 잠을 자면서도 자꾸 떠오르고, 혼자서 속병을 알았다. 그러면서도 이런 나의 고통이 이번의 죄 값을 상쇄하여 불살라버렸으면 하는 이기심이 들었다.

마음고생을 겪고 나니 한 풀 꺾인 자신이다. 지난 세월 다른 이의 행동을 나만의 시각으로 나무란 것 같아 부끄럽다. 앞으로는 남을 함부로 비난하지 않으리라. 당사자가 되면 나도 그렇게 되는 것을 왜 몰랐을까. 이제껏 가졌던 나는 결코 그러지 않는다는 자만은 허상이었고, 나 또한 별수 없는 한 인간일 뿐이다. 아파 보니 정신을 차리게 된 내게 이번 사건은 좋은 선물이 되었다.

날 시험이라도 하듯, 좋지 않은 말을 전해 들었다. 내 의도와는 달리 엉뚱한 오해로 내 몰렸다. 그러나 그게 그리 대수롭지 않다. 이전과 달리 느긋한 마음으로 대하게 되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남이 나를 어찌 알랴. 그렇게 생각하니 크게 화를 낼 일이 아니다.

행동은 생각에서 온다. 그 생각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것이라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엄청난 차이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아무리 하늘과 땅의 차이라 해도 백지 한 장의 다름이 있을 뿐이다. 무에 그 백지 한 장의 두께로 밤을 새워 괴로워할 것인가. 이제 겨우 세상사는 처세를 익혀가려나 보다. 

 ☐ 약력 ☐
*서울 출생
*거제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수료
*계룡수필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