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진석

태풍이 몰아치는 날,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을 들러본 기분이다. 속은 콩알만 해지고, 여기저기 길이 무너진 흔적을 지켜보면서, 그래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음에 마음을 내려놓았던 기억이 새롭다. 재난에서 벗어나겠다는 원대한 대책보다도 우선이었던 건 당장 누울 자리에는 별지장이 없다는 데 안도했던 것 같다.

지금 우리 곁에는 봄기운이 찾아와 있는데도 마음이 설레질 않는다. 창문을 흔드는 저 위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소소리바람쯤으로 여겼는데, 뭔지 모를 불안감이 태풍이라도 몰려오는 기분이다. 성급한 영춘화가 노란 이파리를 내밀고 있으면, 복수초가 푸른 치마 사이를 비집고 노란 얼굴을 내민다.  매화가 부르는 벌은 보이지 않고 꽃샘바람만이 찾아와 옷깃을 여미게 한다. 뒤이어 명자꽃, 개나리, 설유화, 진달래, 목련, 수선화, 할미꽃에 이어 앵두와 살구꽃이 꿀 향기로 벌 나비를 부르나 전혀 반응 없이 시큰둥하다.

계절을 따라 꽃은 개화했건만 열매를 맺지 못한다. 늦봄처럼 온화하다가도 느닷없이 벼락바람이 몰아치니 꿀벌의 외출은 꿈도 꿀 수 없다. 꽃은 지는데 벌이 찾아오지 않으니, 누가 수정을 도와줄까. 만물은 암수가 꽃을 피우고, 사랑으로 열매를 갖고자 하나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이게 다 자연의 변화 탓이다. 사람들은 하 어수선한 세상을 탓하며, 앞으로 도래할 세상에 대해 걱정이다.

열매가 맺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아야 할걸 생각하니 끔찍하다. 앞으로 무엇을 먹고살아야 할까. 내 입에 넣을 먹거리조차 구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슬기로운 것일까. 막연히 부딪히면 해결책이 나오겠지, 하며 허세를 부릴 일도 아닌데, 우리는 태풍이 잠자리를 앗아가지 않았다 하여 안심하고만 있다.

얼마 가지 않아 초고령화 시대가 찾아온다는데 누구 하나 대비하자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지금 눈앞의 삶이 어려운데 그것까지 염려하느냐고 탓한다. 일할 수 있는 노동력은 감소하여 젊은이들이 노인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세상이 바로 눈앞에 와 있는데 어쩌면 저리 태평인지 모르겠다.

지금 당장 일기 불순으로 가루받이를 해 줄 벌이 없어 난리다. 이런 자연의 변화는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만들어졌다. 비단 벌의 문제뿐인가. 물질만을 추구하는 의식 때문에 기본도 없고, 원칙도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 모든 것의 가치는 자신의 이익과 직결되고, 이로 인해 행동의 기저에는 이기심만 새까맣게 둥지를 틀고 있다. 우리 사회에 판치고 있는 개인주의는 절망에 이르는 길로 맞닿아 있는 듯하다. 이 사회를 지탱하게 하는 인간의 기본부터가 무너졌다. 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 그 으뜸은 애타심이다. 이게 무너졌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어느 분야가 제대로 굴러간다고 볼 수 있을까. 이 사회에 난무하는 건 거짓과 위선뿐이다. 금시 드러날 거짓도 정말인 듯 내놓고 큰소리친다. 적어도 양심을 가지고 사람 앞에 서야 할 터인데 그도 아니다. 이렇게 가다 보면 국어사전에 ‘양심’이란 단어는 없어지는 게 아닐까. 우리 사회는 총체적인 난국이다. 도덕 재무장을 해서라도 바로잡아야 우리의 미래가 보장된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특히 정치인들의 각성이 요구된다. 요즘 정치의 계절을 만나 바라보게 되는 현상은 실로 절망 그 자체이다. 국민을 너무 얕잡아보는 듯하다. 분명히 말씀드리면 죄송하지만, 국민이 정치가들보다 훨씬 앞서 있다. 그렇다고 이 모든 책임을 정치가에게 물을 일도 아니다. 차라리 ‘어른’들이 책임질 일이라고 정리하고 싶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는 나이 드신 분들이 바로잡아 주는 데에 앞장서야 한다.

봄이 오면 그 봄을 진정으로 느끼고 싶다. 그리고 순리대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숨 쉬고, 노래하고 싶다. 물론 춤도 추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