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문(白文)

                                                                                                                             우 광 미

새긴다는 건 각인이다. 자신의 정체성이다. 낙관에는 양각과 음각의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인주를 묻혔을 때 나타내고자 한 문양이 붉게 나타나는 양각인 주문(朱文)은 주변을 다 파내어야 의도한 문양이 드러난다. 이에 반해 파인 부분이 희게 나타나는 음각인 백문(白文)은 주변을 그대로 두고 문양 자체를 파내야 한다.

백문을 새기는 날이다. 돌을 사포에 간다. 생각해온 문양을 복사지에 그리고 돌에 옮긴 후, 나무틀에 끼우면 작업은 시작된다. 온 신경을 칼날에 모은다. 잘하고 싶은 과한 욕심을 비워야 손이 긴장하지 않고 칼끝이 부드럽게 나간다. 조금씩 깎인 돌가루가 칼이 나가고자 하는 길을 방해한다.

마음의 고요를 잃은 탓일까. 비켜나간 칼은 돌에 상처를 남긴다. 지울 길이 없다. 빨리 실수를 잊고 몰입해야 한다. 닦아내고 파내기를 수십 차례. 인주를 묻혀 종이에 찍어 본다. 인주를 찍기 전엔 볼 수 없었던 부분이 보인다. 파낼 때는 몰랐던 상처들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 위로 지난 시간을 되짚어 본다.

어쩌면 삶의 정수가 빗나간 칼자국 아래에 존재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좀 더 다듬어 완성된 돌에 인주를 묻혀 다시 찍는다. 잔뜩 가졌던 기대감은 이내 어그러지고 만다. 거꾸로다. 반드시 문양을 뒤집어 그려야만 바로 새겨진다던 선생님의 말이 그제야 떠오른다.

사는 일도 그럴까. 실수를 통해 절실히 깨닫게 된다. 인면(印面)을 사포에 다시 간다. 깊이 판만큼 갈아내야 한다. 내 모난 마음까지 다듬는다. 뽀얀 가루들이 널브러진다. 이 가루 속에 지난날의 허물들을 모두 지우고, 내 삶도 이 돌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시행착오와 오류는 많이 줄일 수 있을 텐데….

문양지를 뒤집어 다시 돌에 옮긴다. 상대의 입장이 되어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문양을 뒤집었을 뿐인데 굵기와 방향이 낯설다. 다시 파내기 시작한다. 내 속의 교만과 아집까지도. 마침내 돌은 눈처럼 정결한 속살을 드러내며 문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백문은 자신을 도려내고 깎아냄으로써 오롯이 드러내는 삶과 같다. 사람의 마음은 작은 방촌(方寸), 즉 가슴속 한 치 사방 넓이 속에 깃들어 있다고 했던가.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도 인생의 마무리 낙관을 찍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하루치의 삶을 각인하며 심혈을 기울여 낙관을 찍는다. 화선지 위에 나의 모습이 붉게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