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조
김덕조

계룡산 정상에서 먹 한 방울 들이지 않았는데도 천 년의 병풍처럼 겹겹이 펼쳐지는 산빛을 보았다.

옥녀봉에서 현 하나 매지 않았는데도 세월을 타고 스스로 울리는 물결의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

국사봉에서 인생의 고갯길을 온몸으로 느껴 봐도 한 낱 범인의 주제에 관음보살(觀音菩薩 :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한다는 보살)의 깊은 뜻을 깨달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순수한 영혼을 간직한 언제나 함께할 가슴 따뜻한 등산동호회 회원님들이 있어 좋고 산이 있어 좋고, 산행을 통해서 인생의 경험과 지혜를 얻을 수 있어서 좋고, 그래서 산에 오르고, 물을 찾는다.

굳이 인자요산(仁者樂山: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자요수(知者樂水: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를 인용할 필요는 없다.

거제의 명산 계룡산 정상에서 삼뢰(三籟: 천하 만물의 세 가지 소리, 즉 天籟·地籟·人籟) 듣지 못해도 좋다.

그저 산이 있어 좋고, 물이 있어 좋다. 물에서 물의 소리를 듣지 못해도 좋다.

왜냐하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산은 물이요 물은 산이요' '산은 물이 아니요' '물은 산이 아니니까!'.
산이 있어 산에 가고 물이 있어 물을 찾아간다.

오상아(吾喪我 : 나를 버림으로써 진정한 나를 찾는다)를 득하려 산에 오르고 또 물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며, 산이 있고 물이 있어 그곳에 가는 것뿐이다.

정상에 서서 산하를 바라보며 뜨거운 젊음의 열정으로 "산아 높아라! 바다여 넓어라! 사람아 맑아라!”라고 비상의 함성을 외치며 인생의 조그만 짐이라도 생(生), 노(老), 병(病), 사(死)의 멍에라도 내려놓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아니한들 어떠하랴!

어차피 인생은 바람과 같은 것인데 물에 가서 지친 영혼 한 줄기라도 씻고 올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아니한들 또 어떠하랴!
어차피 인생은 구름과 같은 것인데

백 번의 산행과 천 번의 물행에서도 진여(眞如: 참된 나를 찾아서 각성)를 깨닫지 못한들 어떠하랴!
어차피 인생은 가고 오는 것인데

산에 못 가고 물에 못 간들 어떠하랴!
보이는 산을 눈에 담고, 보이는 물을 마음에 담으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을 어차피 인생은 아지랑이 같은 것을.

산과 물이 가르쳐 준 것들
산은 걸음의 속도를 낮추어 주었다.
빨리 가려면 호흡이 가쁘고, 천천히 가면 옆 사람의 숨소리를 듣게 된다. 그 숨결 사이로 말보다 진한 마음이 오간다.

정상에 오르는 일보다 넘어지지 않게 서로의 배낭을 잡아 주는 일이 더 오래 기억된다.

물은 방향을 가르쳐 주었다.
돌을 만나면 돌아가고, 낮은 곳을 찾아 흘러가되 결국 바다에 이른다.

산행에서 길을 잃을까 두려웠던 마음도 물가에 앉아 있으면 한 줄기의 흐름으로 정리된다.

인생의 큰물도, 작은 개울도 어쩌면 '멈추지 않는 것' 하나로 서로를 닮아 있는 것이다.

하산 길의 노을은 오르막에서 보지 못한 풍경을 보여준다.

정상에서 환호하던 목소리가 저녁밥 냄새와 섞여 낮아지면 사소한 일들이 제자리를 찾는다.

돌부리에 걸려 발목을 삐끗하던 순간이 겸손의 선생이 되고, 깊은 숨 한 번이 하루의 분노를 씻어 낸다.

동행은 길의 의미를 바꾸었다.
앞서 가던 이가 속도를 늦추면 뒤따르던 이가 용기를 얻고, 뒤에 선 이가 한마디 "괜찮습니다"를 건네면 앞선 이의 어깨가 가벼워진다.

우리는 서로의 산이요, 서로의 물이었다. 함께 걷는 동안에만 산은 높아지지 않고, 물은 차갑지 않았다.

그래서 내게 산행은 깨달음을 ‘획득’하는 의식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연습이다.

고함치는 정상이 아니라 묵묵히 내려오는 길에서 사람의 품성이 드러난다.

다시 내일을 살아갈 힘은 큰 깨달음의 문장보다 작게 나눈 물 한 모금, 등을 받쳐 준 손바닥 한 번에서 나온다.

결국 나는 오늘도 안다.
산은 산으로서 충분하고, 물은 물로서 완전하다는 것을.
그 앞에서 사람은 조금 덜 주장하고, 조금 더 비워도 괜찮다는 것을.

그러니 내일 또 길이 열리면 그저 걸을 뿐, 듣고 볼 뿐이다.
그것으로 족하다.

관음에서 진여로 ― 네 가지 길의 울림
바람이 불어와 숲을 흔들면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 그리고 사람의 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진다. 이것이 곧 삼뢰(三籟)의 울림이다.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이 서로의 숨결을 나누는 자리에서 삶은 더 이상 내 것만이 아니게 된다.

그러나 그 울림을 온전히 듣기 위해서는 나라는 껍질을 내려놓아야 한다.

"오상아(吾喪我)"―내가 나를 버릴 때, 비로소 들리지 않던 참된 음(音)이 열리고, 진정한 자아가 나를 맞아 준다.

그때 우리는 모든 현상을 넘어선 자리를 엿본다. 거짓과 집착을 걷어낸 맑은 거울, 세상의 바탕에 흐르는 본래의 빛.
그것이 곧 진여(眞如)이며, 존재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참된 얼굴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홀로 머무르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그 울부짖음을 들을 줄 아는 자비의 길로 흘러간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은 바로 그 자리에서 서 있다.
자비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나를 버리고, 세상의 소리를 듣는 순간 이미 시작된다.

결국, 삼뢰의 울림 속에서 오상아의 길을 걷고, 그 길 위에서 진여를 깨닫는 이는 관음의 귀가 되어 타인의 눈물을 듣는다.

이것이 인간이 도달해야 할 궁극의 소리이며, 삶이 품어야 할 가장 고요한 울림이다.

김덕조 작가는 "이 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전 지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라며 "인용문의 출처, 표기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글의 성격상 각주와 내주로 하면 가볍게 읽기에는 부담감이 있고, 독자들에게 거부감을 줄 것 같아 필요하신 분에게 참고가 되게 인용문 출처를 정리하였으니 참고 바랍니다"라고 전했다.

[인용문 출처]
1. 관음보살(觀音菩薩)
▪출처: 불교 경전, 특히 《법화경(法華經)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설명: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줄여서 관음보살)은 중생의 소리를 ‘관(觀)’하여, 고통 속에서 구 제해 주는 자비의 보살입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고 자비로써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죠.→ 핵심 사상: 자비와 구제, 즉 타인의 고통을 들을 줄 아는 마음.

2. 삼뢰(三籟)
▪ 출처: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나옵니다.
▪ 설명: 세 가지 소리를 뜻하는데,
▪천뢰(天籟): 하늘의 소리, 바람이 불어 일어나는 자연의 울림. /뢰(籟-세 구멍 통소 뢰(뇌)
▪지뢰(地籟): 땅의 소리, 산천과 만물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세구멍 통소, 소리, 울림
▪인뢰(人籟): 사람의 소리, 피리·악기·노래 같은 인위적인 울림.
장자는 이를 통해 "모든 소리는 다 도(道)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 핵심 사상: 자연·인간·우주의 조화로운 울림.

* 뢰(籟-세 구멍 통소 뢰(뇌)/세구멍 통소, 소리, 울림

3. 오상아(吾喪我)
▪출처: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등장하는 구절.
▪설명: “나(我, 자아의 집착)를 버려야 진정한 나(眞我)를 찾는다”는 뜻. ‘오상아’는 자기중심적 자아의 해체, 즉 무아(無我)의 경지를 가리킵니다.
→ 핵심 사상: 자아 집착을 버릴 때 더 큰 자유와 진정한 삶을 얻는다.

4. 진여(眞如)
▪출처: 대승불교의 핵심 개념,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에서 많이 설명됩니다.
▪설명: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 즉 모든 존재의 본질을 뜻합니다. 번뇌·집착 이전의 참된 자성(自性)이며, 깨달음의 대상이자 동시에 깨달음 그 자체입니다.
→ 핵심 사상: 모든 현상 너머의 궁극적 실상(實相), ‘참된 나’를 깨닫는 길.

정리하면,
▪관음보살은 자비로 중생을 듣고 구제하는 보살,
▪삼뢰는 우주·자연·인간의 소리,
▪오상아는 자아 집착을 버리는 무아의 깨달음,
▪진여는 번뇌 이전 본래의 참된 자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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