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조
김덕조

사량도에서 시작된 한 걸음이
어느덧 지리산 자락에 이르렀습니다.

계절은 바뀌었고,
함께한 사람도 다르지만,
내 마음속 어딘가엔
그때 그 걷던 리듬과 풍경이 아직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는 산행을 단지
‘취미’라고 말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것은
기억을 걷는 일이고, 사람을 품는 일이었습니다.

사량도의 바람, 섬처럼 남다른 시작

사량도의 그날은 바람이 무척 거셌습니다.
바다를 품은 산은
늘 육지의 산과는 다른 생동감을 주지요.

좁고 날카로운 능선을 따라
한 줄로 이어 걷던 우리들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뒤돌아보면 누군가가 따라오고 있고,
앞을 보면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 서로의 존재가 힘이 되어주는 시간.

그날의 바람은 단지 뺨을 스친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묵은 생각까지 쓸고 갔던 것 같습니다.

지리산의 고요, 깊이를 배우다.

지리산은 달랐습니다.
사량도가 젊은 날의 열정 같았다면,
지리산은 마치 노년의 품격 같았지요.

걸음이 자연스레 느려졌고,
침묵의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그 침묵이 결코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조용함 속에서
나는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여백을 얻었습니다.

누군가와 꼭 붙어 걷지 않아도,
우리는 함께 있다는 걸 느꼈고,
그 속에서 진짜 동행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걸음은 사라지지만, 이야기는 남는다.

사량도의 능선 위에서도,
지리산의 고요한 오솔길에서도,
우리는 참 많이 웃었습니다.
그리고 참 많이 기다려주었습니다.

누군가는 발이 아팠고,
누군가는 숨이 차 올랐지만,
아무도 혼자 두지 않았던 그 시간들.

걸음은 사라졌지만,
그 걸음을 함께한 기억은
지금도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따뜻하게 울립니다.

마무리하며

산을 오를 때마다 나는 생각합니다.
“이번 산행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마지막이 누군가에겐
평생 잊지 못할 ‘처음’일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 나는
늘 새 마음으로 걷습니다.
사량도에서 지리산까지,
그 길 위에 새겨진 우리의 추억과 호흡을
고이 안고 또 한 걸음을 시작합니다.

산은 지나가지만,
기억은 머물고,
동행은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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