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근
김주근

누구나 힘든 경험을 한다. 그 경험이 인생의 진로를 바꾸는 동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방향으로 유혹에 빠지게도 한다. 길은 여러 가지다. 스스로 판단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길잡이가 되어주는 이도 있다. 길잡이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지게를 질 때 뒤에서 잡아주며 밀어주면 훨씬 쉽게 일어선다. 느낌도 가볍고, 짐의 균형도 몸의 중심에 맞춰진다. 걸음걸이의 보폭도 안정적이다. 그처럼 누군가가 도와주면 인생관도 달라진다.

아무리 쉬운 길이라 해도 어려운 고비는 있다. 함정도 있고, 모퉁이 돌도 있다. 생각지 못한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그때마다 잘 극복하고 인내하며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내야 비로소 목표가 보인다.

바다도 늘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자연의 변화는 시시각각 바뀐다. 적당한 바람이 불다가도 갑자기 거센 바람이 몰아치고, 이내 바람이 바뀌어 고요해지기도 한다. '예측불허(豫測不許)'의 현상이다.

그때마다 파도는 바람에 따라 춤을 춘다. 잔잔하게 일렁이다가 바람이 돌변하면 너울성 파도로 바뀌고, 태풍이 불면 사납게 뒤집힌다. 장승포 등대 밖 총바위 위로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려올라가는 장면을 해마다 몇 번씩 목격하며 살아왔다.

이처럼 인생길도 험산준령(險山峻嶺)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쉽게 성공한 경우는 없다. 쉽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늘 갈고 닦고, 연마하며, 적당히 담금질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순간적인 판단력과 결단력, 순발력도 필요하다. 색다른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부단히 연구하고 노력할 때 비로소 성공이라는 희망이 보인다.

성공은 70%의 운과 30%의 노력이 함께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1972년, 거제시 아양동과 아주동 일대에 오늘의 '환화오션(당시 대한조선공사 → 대우조선해양 → 환화오션)'이 들어섰다. 1974년 6월 말, 나는 태어난 아양리 59번지(관송마을)에서 능포동 옥수동으로 이주했다.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이주민들의 생활은 막막했다. 화장실도 없고, 담장도 없었다. 부엌에는 물이 고여 있었고, 단창문이라 겨울이면 찬바람이 하루 종일 들어왔다. 가정마다 자식들은 평균 여섯 명, 책가방에 들어가는 돈도 늘 모자랐다. 어머니는 옆집에 돈을 빌리러 가지만, 그 집 형편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5남매의 맏이였다. 중학교 2학년 무렵,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공사판으로 가 일했다. 여자 일당(하루 800원)의 절반인 400원, 일요일에는 800원을 받았다. 이틀이면 1,200원, 내게는 큰돈이었다.

방학이면 공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번 돈은 한 푼도 쓰지 않고 어머니께 모두 드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랬다.

당시 속빈 시멘트 블록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고, 옥명아파트 공사 현장에서는 블록을 지고 5층까지 오르내렸다. 시멘트와 모래를 섞어 자루에 담아 나르고, 삽과 괭이로 땅을 팠다. 2인 1조로 철근을 어깨에 메고 층층이 옮기기도 했다.

대우조선해양 ITT 기초공사 현장에서는 오함마로 콘크리트 파일을 두드려 파괴하는 '돈내기 작업'도 했다.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동생들의 학비를 생각해 스스로 포기했다. 대신 "60세 안에는 반드시 대학을 졸업하겠다"는 다짐을 했고, 그 약속은 60세에 이뤘다.

군 복무 시절 한 달 월급은 2,400~2,700원. 제대 후 모은 4만 원도 어머니께 드렸다. 나는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하는 성격이 아니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한 번도 내 욕심대로 쓴 적이 없다. 어머니께 드리고 필요하면 말씀드렸다. 장남이라서 그런지 욕심도 없었다.

부모님은 숟가락 둘, 젓가락 넷으로 살림을 시작했다. 말 그대로 ‘심청과 심봉사’가 만난 격이었다. 부모님의 소원은 밭 한 평, 논 한 평 가지는 것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어서 커서 사업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품었다. 매일 거울을 보며 눈싸움을 하는 것이 생활이었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신념으로 끈기와 집념을 키우며 '왜?'라는 질문을 늘 마음에 새겼다.

허리 수술을 두 번 한 이유도, 젊은 시절 공사장에서 무리하게 일한 후유증 때문이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 모든 과정이 도전과 배움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도전하며, 황혼의 여생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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