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창암도서관
내가 태어난 고향은 연초면 다공리 중리 마을이다. 1980년, 연초초등학교 4학년 가을에 우리 동네에는 당시 거제에서 가장 좋은 2층 건물의 마을회관이 지어졌다. 1층은 마을회관, 2층은 창암도서관이었다. 고향 출신 창암 이창 회장님께서 기금을 내놓으신 덕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스스로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미래 직업 발표’ 시간에 친구들이 각자 꿈꾸는 직업을 말할 때, 나는 직업보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말의 뿌리는 도서관에 있었다.
만약 그때 고향 동네에 도서관이 생기지 않았다면, 나는 책을 접할 기회도, 지금의 가치관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명절이면 마을을 찾던 이창 회장님을 몇 차례 뵌 적이 있는데, 크고 당당한 풍채와 구레나룻, 강한 인상은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장학사업을 비롯해 고향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다는 이야기는 늘 들으며 자랐다.
몇 해 전, 거제신문 독자위원으로 함께 활동하던 하청면 김백훈 선생님을 모셔 드리다 이창 회장님 이야기를 다시 들었다. 당시 지역에서는 “마을회관과 도서관을 분리해 짓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회장님은 “안 된다, 도서관은 반드시 고향 동네에 함께 지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끔했다. 만약 분리되었다면 도서관 이용이 어려웠을 것이고, 지금의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얼마 후 김백훈 선생님 덕분에 회장님께 직접 전화를 드려 감사 인사를 전할 수 있었는데, 짧지만 값진 순간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회장님께 대한 감사한 마음을 늘 간직하며,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 역시 변함이 없다.
추억의 동네 냇가, 연초천
고향 동네 위쪽에는 대금산 발원지에서 내려온 물길이 흐른다. 이 물은 MP다리를 지나 고현만으로 이어진다. 연초댐이 생기기 전, 연초천은 말 그대로 1급수의 맑은 냇물이었다.
하지만 댐이 들어서고 정수 과정에서 나온 슬러지가 과거에는 그대로 냇가로 배출되면서 수질은 급격히 나빠졌다. 도시 하천은 하수처리시설 도입으로 점차 깨끗해졌지만, 반대로 시골 하천은 오염이 심해졌던 시기였다.
집집마다 수채구멍으로 물이 밭과 논으로 흘러가던 옛집과 달리, 콘크리트집이 늘어나면서 PVC 배관을 통해 생활하수가 소하천으로 바로 흘러들어 오염이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오염된 소하천이 결국 연초천으로 이어졌다.
어린 시절 나는 연초천에서 물놀이를 하고, 물고기를 잡으며 놀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깨끗한 냇가가 지켜지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을 품었지만 지금은 아쉽게도 꿈에 가깝다. 현재 오염된 연초천에서 물놀이를 하는 아이는 없다. 불법 소각, 농업쓰레기, 생활쓰레기까지 하천 곳곳에서 쉽게 발견된다.
2025년 10월 현재, 나는 연초댐 아래 모든 마을의 하수관로가 하루빨리 완벽히 정비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야 연초천이 옛날처럼 맑아지고, 은어가 돌아오며, 아이들이 여름철 냇가에서 다시 뛰어놀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은어가 남긴 특별한 추억
은어는 내게 특별한(?) 추억을 남긴 물고기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학교에서 채변 검사 결과를 발표하던 날이었다. 회충 감염된 학생들이 번호 순으로 앞으로 불려 나와 약을 받는 모습을 보며 ‘다행이다’ 싶던 찰나, 마지막에 내 이름이 불렸다.
의사 선생님은 “혹시 은어를 날로 먹은 적 있냐”고 물으셨다. 기억을 더듬자, 어느 봄날 중리천에서 동생과 대나무 끝에 못을 달아 잡은 은어 한 마리를 자랑삼아 된장에 찍어 먹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 은어 때문이었다. 명동천에서도 옛날엔 은어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하니 지금은 정말 전설 같은 이야기다.
나의 모교, 연초초등학교·연초중학교
나는 20대 중반부터 환경단체 활동을 도왔고, 1998~1999년에는 생태팀장으로 상근했다. 당시 월 활동비는 65만 원, 연봉 830만 원이었다. 결혼 적령기의 남자에게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나는 환경 활동을 마음으로 선택했다.
결혼 후에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와 중학교만큼은 반드시 모교인 연초초·연초중에서 다니게 하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 생각 때문에 능포동 아파트가 아닌 고향 부모님 집에서 먼저 살며 아이들을 키웠고, 결국 두 아들 모두 나와 같은 학교에서 공부했다.
아들이 입학하기 전, 연초중 총동창회 임원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당시 연초중은 학생 수 감소로 한 반 유지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선배님들의 걱정을 들으며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말했다.
“선배님들의 자녀는 어느 학교에 보내셨습니까? 저는 제 아이들을 연초초와 연초중에 보낼 것입니다. 그것이 모교 사랑의 기본이라 생각합니다.”
순간 짧은 침묵이 흘렀지만, 그때의 분위기와 선배님들의 표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국가적으로는 지방소멸, 거제에서는 면지역 소멸이 현실인데다, 연초중학회는 오래전부터 선배님들의 헌신으로 연중장학회가 운영되고 있다. 올해 거제신문에서 입학생 전원 장학금을 지원했다는 이봉균 이사장님의 인터뷰를 읽으며 ‘정말 대단한 공동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동문들의 애교심이 더해져, 동문 자녀들이 자연스럽게 모교에 진학하는 문화가 자리 잡기를 바란다. 학부모 수 감소로 입학생이 줄어드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총동문의 결속이라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 글을 계기로, 연초면과 거제를 위해 더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마음을 다시 붙잡아 본다.
나의 모교, 연초중학교여 영원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