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타임즈 창간2주년 특별기획으로 거제친일협력자들을 연재한다. 앞서 연재한 거제친일단체에 이어 연재한다. - 편집자주-
"신용우는 죽순과 고구마의 아버지"
"경남에서는 제2의 우장춘"
1999년 전국문화원연합회 경남도지회가 발행한 {경남인물지}에 나오는 신용우를 평가한 글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거제 농업의 아버지'로 지칭하고 있지만, 일제에 협력한 사실을 감추고 있는게 현실이다. 일부에서 신용우는 일제강점기에 면장을 지낸 정도만 기억할 뿐이다. 그럼 '거제 농업의 아버지'에서 '일제협력자'로 변신한 그의 삶을 따라가 보자.
신용우는 1895년 거제 하청면 하청리 517번지에서 신주병(辛周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차남 신용기(辛容琪), 삼남 신용위(辛容偉), 장녀 신명옥(辛明玉) 등이다. 신용우는 거제보통학교(현 거제초등학교)를 거쳐 진주농업학교의 1회생으로 졸업했다.
그는 진주농업학교 졸업 이후 1927년 일본 산업 시찰을 갔다 오면서 3그루의 맹종죽 모죽을 가져와서 고향에 심었으나 두 그루만 생육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1925년 11월 하청유지들의 모임인 하청악우회(河淸樂友會)에 활동했다.
부친인 신주병씨는 1926년 11월 17일 통영산림회 임업공로자 표창을 받았으며, 1940년 3월 17일 친일협력단체 통영유도회 참여로 선출되기도 했다.
소작위원에서 친일협력자 면장으로
1930년대 신용우는 하청면에서 맹종죽을 이용한 활동에만 국한하지 않고 각종 친일단체에 가입해 활동하기에 이른다. 앞서 1934년 2월 11일 통영군청에서 주최한 죽림품평회(竹林品評會)에 하청면 대표로 나가 1등(상금 10원)을 차지하게 된다.
1934년 4월 조선총독부에서 제정 ·공포하고, 같은 해 10월 20일부터 시행된 농지의 임대차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면서 부(府)·군(郡)·도(島)에 소작위원회를 설치했다. 소작위원회는 소작인들을 위한 기구이기보다 지주를 옹호하고 소작쟁의를 부채질하는 친일관변단체였다. 소작위원 임명은 도지사가 임명하고, 총원은 4명으로 제한하고 추가로 선임할 수 있다.
신용우는 1934년 10월 26일 통영군(거제포함) 거제유지 대표로 소작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는데, "반도영년(半島永年)을 희망하는 가운데 조선농지령에 따라 통영군 소작위원회를 결성한다. 회장 군수, 위원 내무주임 경찰서장 거제경찰서장 송병문(宋秉文, 통영유지) 신용우(辛容禹, 거제유지), 예비위원 서무주임 거제경찰서 경무주임 유한식(劉漢植, 통영유지), 서기 김준호(金俊鎬, 군청) 이수종(李秀宗, 군속) 등을 임명했다"고 한 신문(부산일보, 1934. 10.26(3) 석간)이 보도했다.
또한 1934년 11월 29일 오전10시 통영군청회의실에서 개최된 제1회 소작위원회에 참석한 신용우는 회장전결 처분사항에 관해, 소작료 멸실사건 해결의 건, 소작료복구와 반환사건 건, 소작 굴복사건 등을 처리하는데 앞장선다.
1934년 3월 조선총독부는 소방조 조원들을 훈련시켜 경찰기능을 확대하고, 비상시 대책으로 6만명 소방대원을 이용해 '조선의용경찰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의용경찰단은 경찰과 동일한 형태로 전국적으로 각 면(面)·주재소마다 1개소씩 설치했다. 주요 임무는 지역경비 책임이었고 치안유지 협력에 주목적을 두었다.
이에 그는 소작위원에서 일제 경찰의 의용조직인 '하청의용경찰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1934년 11월 24일 오전11시 하청공립보통학교(현 하청초등학교)에서 신용우를 비롯해 박두권(朴斗權)과 김건칠(金健七) 등의 지역유지들은 의용경찰회를 조직하고자 중견청년 남자 20명을 선발하여 결성식을 개최했다.
이날 결성식에서 신용우 회장을 맡고, 김한석(金漢石) 간사, 박두권(하청면장) 김건칠(금융조합 이사) 등이 고문을 각각 맡았다. 회원들은 김한석, 신용완(辛容完), 옥치정(玉致亭), 이성수(李成守), 신운수(辛雲壽), 원홍은(元弘殷), 윤병조(尹炳祚), 윤치운(尹致云), 김동성(金銅性), 언채규(元采圭), 박창우(朴昌遇), 남상엽(南相燁), 박영재(朴永宰), 권수인(權壽仁), 주종임(朱鍾任), 신맹호(辛孟浩), 김두령(金斗鈴) 등이 활동했다.
이 조직은 '자발적인 민중조직'이며, 지역경비뿐만 아니라, '경찰기능을 확대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30년대 중엽부터 일제협력자로 변신한 신용우는 1937년부터 1940년까지 하청면장으로 활약하게 된다. 1937년 이후는 준전시체제로 전환되는 시점이고, 조선내에서 각종 항일운동단체마저 악랄하게 탄압하던 시기였다. 특히 1937년 12월 12일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지금의 국가보안법, 항일인사나 단체를 탄압하던 법령)을 실시했으며,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결성, 1940년 7월 10월 전시체제로 전환시키면서 국민총력조선연맹을 결성한다.
이때 일제강점기의 말단 행정기관인 면장은 국민정신총동원 통영군 하청면 이사장, 국민총력통영연맹 하청면 이사장 등을 맡으면서 일제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된다.
1937년 12월 15일 '비상시국'을 맞아 통영군 소속 관공리원 한 사람이 애국전투기 1기를 헌납하기 위해 헌납운동에 하청면장으로 참여하고, 같은 해, 애국전투기를 '경남호'로 명명하고 통영군 유지들에게 1만4백여원의 헌금을 모금한다.
또한 신용우는 면장 재직시절 관포어업조합장을 맡는다. 1938년 3월 거제어업조합을 분할해 거제어업조합, 양운(兩運)어업조합, 관포어업조합, 성포어업조합 등 4개 조합을 결성하게 된다.
신용우는 장목면 장목과 하청을 하나의 구역으로 정해 관포어업조합 조합장에 임명된다. 당시 관포어업조합의 임원은 신용우 조합장, 김도항(金度沆)·박경춘(朴慶春) 감사역, 손계번(孫啓審)·박두권(朴斗權)·정백만(鄭栢晩) 등이 특별의원으로 선출됐다.
친일협력단체인 조선농회 통영군 농회 임원으로 선출된 신용우는 1938년 10월 4일 통영군청회의실에서 제14회 통영군 농회 총회에서 하청면 대표 의원으로 선출된다.
농회(農會)는 일제강점기의 친일경제단체 가운데 대표적인 단체로,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을 보조한 대행기관이며, 일제의 농업정책을 각 지방에서 실현시키기 위한 핵심 조직이었다. 1930년대의 농촌진흥운동 간계에서 농회는 농사개량보다는 공동 구판(購販)과 농업창고 설립 사업을 위주로 전개했다. 주요 간부들은 전직 관료나 지주·자본가들이 역원에 임명되었다.
'모범창씨자'로 변신한 신용우
1938년 3월 16일 조선육군특별지원병제 실시로 '충성스런 황군'지원병을 모집에 각 군·읍·면 단위별로 적극 참여하게 된다. 또한 같은 해, 4월 26일 일주간 국민정신총동원 총후보국(銃後報國)강조주간을 실시하면서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의 서사'에 따라 하청면도 함께 참여한다.
1939년 4월 26일 거제 육군지원병 후원회에 하청면장 자격으로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이 후원회는 거제청년훈련소 지원과 육군특별지원병 입소생들을 지원하고자 거제경찰서에서 결성식을 가졌다.
1940년 3월 17일 오전10시 통영읍 공립심상고등소학교 강당에서 "전 유림들이 대동단결해 황도(皇道)정신을 앙양하고 사회풍교(社會風敎)쇄신에 노력"하고자 통영군 유도회를 결성한다. 신용우는 하청면장으로 평의원에 선출되고 부친 신주병씨는 참여로 다른 친일협력자들과 함께 선출된다.
이날 신용우를 비롯한 참여자들은 "우리나라(我國)의 황국신민으로 자각하는데 노력하고, 매일 아침 궁성요배(宮城遙拜)로 황국정신앙양하며,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의 실천을 다한다"고 다짐했다.
또한 1940년 2월 11일 조선인 씨명에 관한 조선민사령을 개정해 '창씨개명'제도를 실시하면서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바꾸게 했다.
이에 신용우는 하청면장과 관포어업조합을 맡으면서 자진 모범창씨자로 나서게 된다. 1940년 8월 신용우는 백산용우(白山容禹)로, 이사 주기수(朱奇守)는 류안현전(類安賢轉), 김도항은 금본도항(金本度沆), 박경춘은 은산경춘(殷山慶春), 윤상원(尹尙遠)은 이원의명(伊原義明), 배삼식(裵三植)은 배원정웅(裵元貞雄) 등으로 각각 창씨개명했다.
특히 자신이 개명하면서 재직하고 있던 하청면은 1940년 8월 10일 창씨개명 마감일까지 1,178가구 중 91가구를 제외한 1,087 가구가 창씨개명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신용우는 일제강점기 말기 농산물의 증산을 꾀하고자 '농촌대책위원회(農村對策委員會)'에 참여하면서 농업전시동원에 적극 협력한다.
이 단체는 지주동원계획실시, 부재 지주의 농지관리안, 농지관리자의 자질개선, 분산경지의 정리강화, 농업증산실천원(農業增産實踐員)의 확보 등을 주요 업무로 삼았다.
1944년 2월 신용우는 통영군 농촌대책위원회에 탁동조(光山卓一, 도회의원, 모범창씨자), 김영수(金村吉祐, 도회의원, 동부출신, 모범창씨자), 송병문(山本秉文, 친일지주, 러일전쟁기념비 부회장), 김현국(金元炫國, 도평의원, 통영군 농회 부회장) 등 통영·거제친일파들과 함께 위원으로 선출됐다.
해방후 도의원과 우익단체 간부
신용우는 1946년 9대 면장을 역임하면서 고구마의 새 품종을 도입 농가마다 보급하여 종가 소득 증대에 앞장서기도 했지만, 건국준비위원회 하청지부장, 국민회 하청지부장 등을 맡았고, 1952년 경남도 초대 도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1960년 5월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일부에서 "거제 하청에는 새 농사의 선각자인 그의 기념비가 건립되어 앞날의 농촌 개발에 횃불이 되고 있다"고 말하지만, 일제강점기에 협력한 사실에 대해 어떤 반성이나 재해석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신용우는 동생 신용기와 다른 삶을 살았다. 신용기(辛容琪, 辛鐵)는 거제보통학교 졸업, 경성 사립 양정보통학교(養正普通學校) 2년 수업, 국자가사범학교(局子街師範學校) 속성과(3월) 졸업, 상해에 있는 중국공학(中國公學)에 들어가 6개월 마치고, 남경국민대학(南京民國大學) 정치경제과 1개년 수업, 상해에 있는 법률전문학교(法律專門學校) 법과 2년 마쳤다. 또한 1922년 4월 명치대학(明治大學) 경제과에 들어가 2개월 정도 있다가 퇴학당했다.
그 이후 1922년 4월 일본 내지 유학중 북성회(北星會) 김찬(金燦)의 만나 니코리스크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총국과 연락하고 비밀리 「니코리스크」로 건너가서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에서 전전하고, 1923년 신민사(新民社) 기자가 되었고, 사회주의자 여자고학상조회장(女子苦學相助會長) 정종명(鄭鍾鳴)과 결혼한다. 이후 1924년 2월 이활(李浩), 조봉암(曺奉岩), 민태흥(閔泰興) 등과 함께 토요회(土曜會) 및 무산청년회(無産靑年會)를 합병하여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을 조직하고 동회의 위원이 되었다.
이처럼 형인 신용우는 일제협력하고, 동생 신용기는 철저한 사회주의자로 활약했다.
